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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e - 당신의 슬픔을 지워드립니다.
네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했다.
그 기쁨이었으면 했다.
네게 필요한,
그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 조병화, 남남
" 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네 정의 자체가 싫거나 증오스러운 게 아니야. 오히려... 너도 알듯이, 그에 매료된 사람이지. "
" ..그럼에도, 그것이 너를 죽이는 순간이 오게 두지 않을 거야.”
곧게 뜬 눈빛이 네게 향했다. 부술 것이라 말했지만, 네 정의가 쉬이 부숴질 리 없다는 것은 제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갑자기 악을 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악을 저질러도 놓지 않겠냐는 질문은, 그저 확인에 불과했고, 둘 모두 그것을 알았다. 물론... 그것마저도 너일 것이다. 헤르샨은 자신이 벤을 먼저 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당장에, 질문의 답은 의미가 없다. 제가 막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너를 무너뜨리는 정의였다. 네가 쌓아온 모든 정의를 부술 수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헤르샨은 벤데타를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그의 정의로움을 사랑했다. 그러니 제가 저지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정의가 괴물이 되어, 네 스스로를 잡아먹는 순간뿐이다.
헤르샨은 네가 정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척이나 아렸다. 왜? 무엇을 위해서? 사람은 정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한낱 인간이기에, 너는 반드시 불행해질 것이다. 결국에는 네 정의가 너를 죽일 것이다. 뻔한 결말, 뻔한 이야기. 헤르샨은 그의 이야기의 정의를 사랑했지만, 그의 이야기가 정의로만 끝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욕망하고, 그로 인해 행복해진다. 네게 단순히 정의가 욕망하는 것이기를, 그리고 종래에는 행복했습니다. 따위의 상투적인 말을 적어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의 마지막 소망이 저였다면, 헤르샨의 가장 큰 욕망은 너였다. 헤르샨은 바라는 게 많았고, 포기하는 법을 몰랐으나... 그럼에도,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네 말이 이어진다. 헤르샨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방금..뭐라고 말했지? 분명 들은 이야기인데,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니까, 벤데타가... 원한다면 자신을 죽여, 박제하라고 제게 일렀다. 헛웃음이 새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분노로 몸이 잘게 떨려오는 것이 느껴진다. 사실, 제가 그를 쳐봤자 발키리의 근력 따위로 큰 타격이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 들었으나 아무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지금 자신이 매우 화가 난다는 것. 그가 제게, 불쾌하기 그지없는 제안을 했다는 것. 이 상황을 대변하기 위한 행동이면 무엇이든 족했다. 생각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헤르샨은 온 힘을 담아 제 앞에 서 있는 허여멀건한 남자의 등을 힘껏 내려쳤다. 작은 신음소리가 새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동자를 마주하고서야 치밀어 오르던 짜증이 조금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얼굴을 때리기에는 얼굴이 아깝지, 같은 농담을 칠 수 있을 정도로.
" ..내가 어떻게 너를 죽여, 벤. 나는... 마지막까지도 너를 놓지 못할 텐데. "
그의 결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헤르샨은 마지막까지 답을 말하지 않았지만, 벤데타가 거죽만이 남게 되어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침묵에서 읽었을 테다. 헤르샨은 그를 박제하고 싶은 게 아니였다. 너를 잃을 바에야, 어떤 너라도 제 옆에 있는 게 나았다. 헤르샨이 욕망하는 것은 네 전부였다. 잘라내어 기억에 담아둔 페이지 따위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헤르샨이 네게 바란 게 있다면 오래 제 곁에 살아있을 것과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 뿐이다. 그러니 그 외에 너는 무엇이든 제게 만족스러웠고, 그 자체로 좋았다.
너는 제게 마지막까지 놓지 못할 사람이였고, 그저 네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런 스스로가 너를 죽이다니. 잘못 읽어도 단단히 잘못 읽은 셈이다. 헤르샨은 너를 죽여서까지 얻을 것은 무엇도 없었지만, 너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놓을 사람이었다. 그러니 네가 제시한 것은 정말,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방법이였다. 듣기만해도 불쾌함에 짜증이 났다. 헤르샨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며, 모든 가능성이 비로소 종말을 맞는 것. 그 무엇도 죽음 너머에서는 이어지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리하여 헤르샨은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을 바라며, 제 소중한 사람의 삶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네 정의가 너를 죽이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리고 그 해결법이 제 손으로 너를 죽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끔찍한 절망이였다.
나는 그냥,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것 뿐이야.
헤르샨은 네 제안을 따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이, 제가 하고자 하던 말들을 다듬었다. 너는 정의를 부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네가 평생을 녹여내어 만든 유리병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헤르샨 역시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정의 외의 모든 것을 버리게 될 날은 없을 것이다.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기에. 자신은 벤데타의 마지막 소망이였지만, 네가 놓는다고 해서 놓아질 소망도 아니었다. 언젠가는 벤데타가 유리병 안의 사탕에게서 손을 뗄 결심을 한다고 해도, 사탕은 네 옆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네가 책이 아니라 사람이듯, 자신 역시도 사탕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였다.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네 소망은 놓아도, 잘라내도, 도망쳐도, 결국에 옆에 있을 사람이었다. 헤르샨은 언제나 그랬듯이... 노력하는 것과 포기하지 않는 데 능숙했다.
“ 네 정의를 전부 부술 생각은 없어. 네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정의 대신 자리를 차지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야. "
" ...그저, 날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게 될 거야, 벤. 소망하는 법을 잊지 못할 거야. 따뜻했던 기억을 잊지 못할 거야."
" 내가, 네 옆에 계속 있을 테니까. ”